아직 오픈 준비 중이라 손님이 없는 BAR 안에 흰 면 행주를 들고 와인 잔을 섬세히 닦고 있는 현의 곁으로 여실장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녀가 곁에 온 것을 알았지만 현은 모르는 척 여전히 와인 잔만을 닦을 뿐이었다. 그런 현의 목 줄기를 농염한 손길로 쓸어내리며 여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너지?”
현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옅은 미소만을 띄우고는 대답했다.
“뭐가 말입니까?”
“너 같은 녀석을 영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앙큼하다고 해야 하나. 별로 숨길 생각도 없으면서 또 인정은 하지 않지. 적당히 꼬리 남기지 않고 일 벌리고 치고 빠지는 기술이 제법이잖아?”
“제가 모를 말만 하시네요.”
“어머? 그렇게 계속 시치미 떼시겠다? 뭐, 네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너무 그러지는 말아야지? 이미 다 눈치 채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말이야. 계속 그러면 귀엽다가도 얄미워진다?”
닦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여실장과 눈을 맞췄다.
“여실장님께 미움 받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요.”
“귀여운 말도 할 줄 알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내 취미는 아니지만 내가 궁금한 건 또 못 참거든. 그래서 내가 우리 귀여운 현이를 살짝 알아봤지 뭐야?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머리가 꽤 좋던걸? 다 알만한 명문대에 거기다 법대생이라고?”
“그런 거라면 뒤로 알아보지 않으셔도 제게 직접 물어보셨다면 충분히 대답해 드렸을 텐데요. 괜한 수고를 하셨네요.”
“나는 똑똑한 녀석은 좋아해. 설사 음험하다 해도 멍청한 애들보다는 훨씬 낫거든. 그런 의미에서 현이는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어. 머리 좋지. 눈치 빠르지. 낄 때 안 낄 때 구분 할 줄도 알고 거기다 배짱 있게 모험도 할 줄 알고 말이야.”
“실장님 칭찬이 과하신데요.”
잠시 현이를 빤히 보던 여실장이 입을 뗐다.
“나랑 같이 일해 볼래?”
여실장의 그 말을 들었을 때 현이는 드디어 원하던 목표의 첫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조직과는 어떠한 연이 없던 자신이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계획했던 일의 성과가 드디어 보인 것이다. 하지만 현이는 단순히 조직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었기에 여실장의 상대로 좀 더 자신의 가치를 높여보기로 했다.
“여실장님과 일하면 제가 얻는 건 뭡니까?”
“흠~. 원하는 게 있니?”
“저는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 주의라서. 거기다 귀찮은 일도 싫어합니다. 적절한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처음부터 손도 대지 않죠.”
“그런 것 치곤 네가 뒤에서 한 일은 꽤나 귀찮았던 일인 거 같은데....?”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잘 모르겠네요.”
능청스럽게 발뺌하는 현이의 연기가 여실장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뻔뻔스러움이 마음에 들 정도였다.
“내 바로 밑으로 자리 하나 줄까? 당장은 안 되겠지만 밑에 있는 다른 녀석들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빠르게 너를 끌어올릴 만한 능력은 되지. 내가.”
“보장할 수 없는 달콤한 말만으로는 구미가 안 당기는데요?”
“흐음~, 꽤나 비싸게 구려고 하네. 좋아, 그럼 네가 오겠다면 이사님에게 내일 당장이라도 널 따로 소개시켜 주도록 할게. 내가 직접. 똑똑한 너라면 충분히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여실장이 직접 이사에게 따로 자신을 소개하겠다는 것은 정식으로 조직에 들어오게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윤형조 이사의 측근 중에서도 나름의 세를 과시하는 그녀가 말단의 녀석을 직접 이사에게 소개했다? 그건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녀석이 보통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적어도 여실장의 비호가 있는 녀석이니 함부로 건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그렇게 여실장의 얼굴을 걸고 소개한 녀석이 그저 그런 말단으로 계속 남아 있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여실장의 말은 이사에게 하는 소개를 통해서 자신이 끌어 올려줄 수 있는 위치의 자리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보장해주겠다는 거였다. 현이는 이정도면 제법 괜찮다 생각했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갖은 것도 잃을 수 있었다. 현이 조심스레 여실장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 대답은 이걸로 되겠습니까?”
여실장이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센스도 좋아라.”